채워진 텅 빈 공간
개인전 / 2022. 11. 9 – 11. 30 / 스튜디오126
평 론 / 김 노 암(미술평론가)
빛의 기둥, 더 넓고 깊은 세계
1
제주의 구도심, 사방이 낮은 집과 골목길로 이루어진 장소에 <스튜디오 126>이 있다. <스튜디오126>이라 명명된 집은 오래전 사람들이 떠나고 남겨진 폐허, 폐가에서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 장소이다. 사람이 거주하는 장소가 아니라 의미와 형식, 사건이 아주 잠시 머물거나 경유하고 지나가는 곳이다. 이번 전시는 이전에 작업들과 비교해 볼 때 확연히 전시 장소의 장소성에 특별한 성격을 부여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명확하게 투영되어 있다.
오랫동안 나무와 숲, 바다와 해안, 바람과 돌이 작가의 작품이 다뤄온 세계이다. 지구와 대자연을 그림으로 표현해온 작가는 어느 순간 그림과 그림의 밖의 현실을 연결하고 있다. 또한 보다 개념적인 사유와 설치로 확장해 왔다. 이번 그의 개인전 <채워진 텅 빈 공간>을 채운 작업들은 수평과 수직, 회전하고 반복하고 솟고 가라앉는 시각과 사유의 다양한 운동과 방향, 세기가 복합적으로 혼융되어 있다. 작가가 견지해온 문제의식과 창작과정에 깊이를 더해온 사유의 연장이다. 작가의 이번 작업은 회화보다는 설치에 가깝다. 또한 장지에 은분으로 제작한 이미지는 단순한 평면 이미지가 아니라 마치 홀로그램을 통해 다양한 차원의 현실들을 경험하게 하려는 듯 중층적인 이미지의 레이어를 보여준다.
“나는 자연은 선택하여 보는 것이 아니라 순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대상으로 여긴다. 보이지 않은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다. 변하지 않는 시간을 느끼고 자연이 되어 나를 바라본다.(기둥, 2022)”, “본질은 그런 것이다. 근원적 본질은 존재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되는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보여진다. 본질은 정지해 있는 상태가 아니다. 바위와 떨어져 나간 돌, 본체는 무엇일까? 생의 순환의 시작은 어느 것에서 시작하는가?(위대한 유산, 2022)”, “순환의 연결고리, 즉 본질은 그 자연의 일부가 되기 전까지 알 수 없다. 눈 앞에 펼쳐진 공간은 자연의 섭리를 알았을 때 비로소 공(空)으로 돌아가 ‘채워진 텅빈 공간’이 된다.(백일몽_하늘, 2022)”
이번 전시의 작업 노트를 보면 조기섭 작가가 감각적이고 재현적인 세계가 아니라 그 너머의 보다 형이상학적 사유에 작업의 비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연과 본질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작가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기억을 오랫동안 사색하고 자기 방식으로 감각과 개념의 결합을 통해 표현해왔다. 전시와 물질적 또는 형태의 표현이란 물질성과 비물질성이 독특한 감각과 형식으로 어우러진다. 작가의 설치를 경험하며 관객은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고 작가가 고민했던 지점에 접촉하게 된다. 설치 환경에 관객은 들어감으로써 작품의 부분 요소가 되고 작품이 일정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이상적 관객과 완전하게 완결되어버리는 설치미술의 경험은 매력적이다. 그러나 감각적 인상과 경험을 가로지르며 작가의 작업은 공간과 시간, 존재와 기억과 본질의 사유를 통해 상징의 문제와 연결되며, 일상 세계의 경험과 이해의 영역으로부터 멀리 확장하고 이탈한다.
오래된 집과 오래된 기억이 만난다. 시간의 중력이 중첩된 장소는 우리가 바라보는 것 이상으로 장소가 우리를 바라본다. 동시에 작가의 작품이 창작자와 관객을 바라본다. 시선과 시선이 만난다. 시선은 모든 곳에 편재해 있다. 집은 기억하고 있다. 집은 하나의 세계이다. 낡은 세계일지언정 하나의 완전한 법칙과 문화를 품고 있다. 조기섭 작가는 빛의 길을 따라서 오래된 세계와 기억에 한 걸음 다가간다.
2
고대 근동의 또는 지중해의 신전들의 기둥을 옮겨 놓은 은빛의 기둥이 집안에 세워져 있다. 이 은빛 기둥은 물리적으로 이 낡은 집을 지탱하는 기둥은 아니다. 삶을 지탱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세계의 지붕을 지고 있는 거인과 그의 등에 짐 지운 기둥은 어디에 있는가. 작가가 세운 기둥은 물리적 경험의 공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작가의 마음 속에 세운 것을 은유한다. 작가는 아주 오래된 주택을 현대미술을 실험하는 전시장으로 연출한 <스튜디오126> 속으로 들어간다. 약간의 시차를 두고 관객은 작가가 걸어 들어간 세계로 들어간다. 지붕을 받치는 낡은 기둥들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높이 솟은 은빛 여인(여신)이 새겨진 기둥이 있다.
은빛 기둥을 중심으로 1층과 2층의 공간에 은빛의 평면 이미지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 이미지들의 위와 아래, 좌우로 그 이미지를 반영하는 거울이 있다. 전시장 2층에는 빙하가 녹으며 드러난 돌들이 좌우로 대칭하고 있다. 작은 옛집의 분할된 공간과 동선을 따라서, 본래의 기둥과 벽면과 조응하며 조기섭 작가의 은빛의 이미지가 원상과 원상을 반영한 모상이 공존하며 새겨지고 장치된다.
태고의 여신 ‘마고 할미(설문대할망)’의 나라 제주는 세계를 여신이 지탱하고 있다. 신화에 따르면 마고 할미는 산과 바위, 강과 하천을 만들고 세계의 창조에 관여한다. 우주의 질서를 지탱하는 것은 신들이고 여신들이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우주를 연결하고 안전한 질서와 규칙을 만들고 매개한다. 세계와 우리 존재의 기원을 다룬 신화를 만나면 인간은 작아진다. 복잡하고 숭고한, 감동적이지만 동시에 불가사의하고 아이러니한 이야기들의 씨줄과 날줄로 짜여진 거대한 신화는 우리의 상상력을 고무시킨다. 이름을 지어주고 불러주고 계속해서 상상하고 생각함으로써 세계는 생동하고 안전해진다. 세계의 지속이란 곧 이름을 지어주고(창조), 기억하고 부르는(노동) 활동을 통해 가능해진다. 신들의 이야기(신화)가 망각되고 마침내 완전히 사라진다면 미하엘 엔데의 환상소설 <끝없는 이야기>의 세계처럼 우리의 정신 세계도, 우리의 정신과 물질의 균형도 완전히 무너지고 소멸해버릴 것이다.
“이 하늘의 저쪽, 모든 것의 저 쪽, 그 위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최고의 천상계에서 빛나는 빛은 바로 인간 안에서 빛나는 빛과 동일하다. (찬도갸 우파니샤드)”
인류 문화 속 신화와 종교에서 ‘빛’은 세속적 세계에서 영적이며 신성한 영역으로 나아가는 길을 상징해왔다. 조형적 점으로 환원하는 원근법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인 점(코나투스) 또는 내적인 빛, 신성의 표징으로 우주의 빛, 신의 눈동자를 은유하는 신성한 기하학 등을 은유한다. 빛은 형이상학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비현실적이며 일상적이지 않은 사건을 예감하거나 상기시킨다. 은분은 색으로 인식되지만 그보다는 하나의 빛을 은유한다.달빛.신화속해와달남매의이야기에서바로달의 자녀들은 은빛으로 신비한 존재성을 드러낸다. 오래도록 은은 빛으로써 인간의 마음을 위협하는 다양한 위협들로부터 지켜주는 벽사의 의미가 부여돼왔다. 근대 화학이 발달하기 전까지도 액체 은인 수은은 우주적 비밀로 가득한 연금술 시대의 여왕이었다. 은은 현대보다 과거 신화시대의 빛이고 색이다. 그러니까 은은 연금술과 신화의 영역에 속한다. 마법과 신비가 일상이었던 시대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은색을 사용한다는 것은 빛을 다루는 것이고 신화를 다루는 것이다. 조기섭 작가는 아주 낡은 주택한가운데은빛의기둥을세운다.오래전뤽베송의영화<제 5원소>를 떠올린다. 영화의 마지만 씬은 여주인공의 가슴에서 우주를 향해 뿜어져나오는 빛기둥이다. 지구 인류를 구원하는 빛이다.
3
삶의 의미가 궁금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삶의 의미를 찾을 정도로 자신이 진지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의 삶의 무게를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삶을 구성하는 장소와 시간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 사람도 결코 없다. 우리는 의식하던 그렇지 않던 다양한 방식으로 나의 삶의 의미를 간절히 모색한다. 원형적 결핍과 욕망은 원형적 질문을 던지고 유령처럼 반복해서 출몰한다.문득 삶의 의미가 사유의 중심에 솟아버리면 평범한 일상은 낯선 세계가 된다. 일상은 궁극적인 질문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달라진다.
인간의 역사는 당대 인간이 당면한 문제 해결의 역사이지만, 동시에 인간이 짐승의 단계에서 갑자기 벗어나 스스로 인간이라 부르는 반자연적인 상태로 변신했을 때부터 인간 스스로 ‘문제’가 된 역사이기도 하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스스로 ‘문제’가 됨으로써 역사란 문제가 굴러가는 모양으로, 결코 문제 해결의 역사가 아닌 문제발생과 문제진화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문제의 심화와 복잡화인 것이다. 눈앞의 문제를 다른 문제를 만들어 덮어버리거나 기만하는 교묘한 방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바로 이 ‘인간’이라는 상식적 규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운동도 볼 수 있다. 문명과 문화에 대한 다양한 방식과 차원의 저항과 대안의 제시인데,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적 세계를 벗어나 새로운 존재 방식의 모델을 모색한다. 그것은 시적 상상력일수도있고완전히다른종류의몽상과비전에의해 제시되기도 한다. 아마도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 무수한 익명의 예술가들의 감정과 사유와 창작의 노동이 오랜 시간 쌓이며 하나의 숙명처럼 또는 영적 중력으로 쌓여서 거대한 지각변동을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일지도 모른다. 용도를 다한 낡은 장소에서 작가는 새로운 신화와 전설의 텍스트를 만들어간다. 문제의 해답을 답이 마치 분명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이미 있다는 식의 문답이 아닌, 또는 다른 문제로 은근슬쩍 눙치지 않는 방식으로, 화산과 바다, 바람과 돌과 나무가 만들어낸 놀라운 섬 위에서 인간이 만들어온 신화적 사유로 지은 건물을 짓고 있다. 조기섭 작가의 근래의 작업들은 이런 움직임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신화의 빛으로 일상을 비추고 있다. 초시간과 초공간. 진공이 아닌 우주전체, 모든 것이 끈끈하게 가득찬 세계에서 작가는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 신화와 역사, 문명과 자연, 해양과 대륙이 만나는 제주에서 작가는 새로운 유형의 작업과 전시를 통해 작가의 태도를 가늠하고 있다. 시원을 확인할 수 없는 인류사의 거대한 시간의 흐름을 역류하며 나아가기도 하다. 은빛의 이미지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깊은 사유의 바닥에 빠져든다. 몰락하고 있는 현생 인류의 문명을 목격하면서 현대미술은 신화와 과학, 영성과 철학이 상호간섭하며 새로운 차원을 개시하려고 한다. 작가에게서 미술은 단지 조형적 실험의 세계에서 벗어나 더 멀고 깊은 세계로 나아간다. 현대 미술은 어디까지 왔는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전 시 서 문 / 권 주 희(독립기획자 스튜디오126 대표)
채워진 텅 빈 공간 Space Z: The Vacant Fullness
한국화를 매개로 형상 너머의 형상을 탐구해 온 조기섭 작가는 시간의 축을 따라 축적된 의미를 들추어내고 유형과 무형, 형상과 본질 사이를 탐구한다.
《채워진 텅 빈 공간》은 형상으로 가득한 화면을 다시 갈아내어 비우는 작가의 작업 방식, 그 과정과 결과를 통해 더 넓고 광대한 세상을 마주하며 깨달음을 얻는 시간을 뜻하기도 한다. 즉, 작가는 작업을 대함에 있어 무엇을 ‘잘 그리거나’, ‘해내야 한다’라기 보다는 욕심을 비워내고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 그 안에 깃든 원형과 본질을 들여다본다.
본질은 근본적인 것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이며, 일반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어떤 것이다. 시각예술을 다루는 작가는 손의 수고로움, 즉 쌓고 다시금 비우는 행위의 반복으로 자연을 표현하고 본질을 찾아 나간다. 존재와 부재가 거듭되어 형성된 공간, 그리고 그 공간 사이 드러난 여백을 통해 비로소 내가 자연에 속한 존재이며 한없이 작은 찰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자연을 닮은 인공물, 자신의 심상으로 바라본 자연의 이미지를 화면에 제시하고 있지만 그 너머를 사유하게 하고 진리를 마주하도록 이끈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한국화를 기반으로 재료의 확장을 시도하고 회화와 설치의 경계를 넘나드는 방식으로 세계관을 구체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