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섭: ‘풍경의 비밀’에서 ‘비밀의 풍경’으로


 견줄 수 없는 빛이 있다. 나무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빛줄기, 밤바다를 비추는 달빛, 검은 방을 밝히는 촛불, 신목(神木)에서 느껴지는 푸른 빛. 조기섭은 빛의 형질을 그린다. 정확히는 빛이 대상에 부딪혀 상호작용하면서 퍼져나가는 공간의 생기적 흐름을 시각화한다. 이 시각화는 영겁의 시간을 지속하는 자연과 유한한 생명체의 생(生), 그리고 소멸하고 다시 태어나는 윤회(輪廻)에 닿아 있다.


 빛은 조기섭의 초기 작업부터 작업의 중심에 있었다. 인왕산을 그리던 그 시절, “노을은 눈에 보일 때가 아니라, 땅에 반사돼서 올라오는 빛이 제일 예쁜 것 같아”라는 김영갑 사진작가의 말은, 작가가 빛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이끌었다. 이후 제주도로 귀향해 곶자왈에서 나무를 뚫고 들어 오는 빛을 보면서 빛에 대한 다른 감각이 돋아났다. “빛이 눈에 보이면 빛으로 느껴지지 않았다.”(작가와 인터뷰) 그는 공간의 특성과 심리적 상황에 따라 빛을 마주하는 느낌이 달라지는 것을 표현하고 싶고, 그래서 은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은분은 위치에 따라 반사된 빛의 느낌이 달라지기 때문에, 이것으로 표현된 대상은 빛이 시각을 매만지는 듯한 독특한 감각을 경험하게 된다. 더불어 작가는 호분(흰색)을 사용함으로써 백색도(whiteness)를 높인다. 


 ‘백색도’는 조기섭의 작업 세계를 상징하는 핵심어라고 할 수 있다. 사전적 의미로 백색도는 ‘물체 표현의 흰색 정도를 특징짓는 양’을 뜻한다. 작가는 이 의미를 기초로 ‘백색도’를 자신의 작업 세계를 관통하는 확장된 개념으로 제시한다. 그는 먼저 ‘백색도’를 흰색 그림을 의미하는 ‘白色圖’로 전환하여, 작품의 시각적 특성을 드러내는 용어로 위치시킨다. 그리고 여기서 한 단계 더 들어가 각각의 글자를 그 글자가 상징하는 의미를 나타내는 다른 글자와 중첩한다[白(백)=無(무), 色(색)=形(형), 圖(도)=象(상)]. 보이는 것은 ‘형(形)’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상(象)’이다. 그리고 없는 상태, 즉 사라진 상태는 ‘무(無)’다. 조기섭은 ‘백’을 행위와 흔적만 남은 공(空)으로서 ‘無’에, ‘색’을 빛이 머물러 보이게 되는 ‘形’에, ‘도’를 심경(心景) 이미지로서 ‘象’에 중첩함으로써 개념을 확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중첩은 작가가 작업 방식(無)과 그 대상(形), 그리고 이면(象)을 중요시함을 깨닫게 한다. 


 조기섭의 작업은 ‘무’로 시작하여 ‘무’로 끝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시작의 ‘무’는 ‘없는 상태’이지만, 끝의 ‘무’는 ‘비워진 상태(空)’이다. 그는 “수행의 과정을 종이에 올린다.”(작업노트) 작가는 아무것도 없는 한지에(없는 상태) 은분을 도포한 후 그것을 지워낸다(비워진 상태). 이 과정에서 닥나무 껍질을 손으로 떠내서 한지를 만들 때 평평하게 펴기 위해 했던, 보이지 않던 붓질 자국이 은분을 지워내는 과정(sanding)에서 희미하게 드러나고, 의도하지 않았던 자연스러운 공간이 화면에 펼쳐진다. ‘무’는 빛과도 연결되어 있다. 눈부신 빛은 대상을 하얗게 만들어 잔상만 남긴다. 작가는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 아무것도 없이 끝나는 “생애의 시작과 끝처럼 풍경도 그런 느낌을 주고 싶었다.”라고 말한다(작가와 인터뷰). 이것이 행위와 흔적만 남는 ‘무’의 작업 방식이다. 


 빛이 머물러야 ‘형’이 드러난다. 조기섭은 형을 통해 빛을 그린다. 지워내는 행위와 남은 자국으로 자연스러운 공간이 열리면, 그는 그 공간과 호흡하며 돌, 나무, 물 등의 자연물이나 불상, 석상, 샹들리에 같은 인공물을, 마치 빛이 대상을 빚어내듯 은분만으로, 때로는 호분이나 간혹 과슈를 함께 사용하여 그린다. 사전 스케치 작업 없이 공간에서 느껴지는 흐름을 따라 공간과 대화하며 작가는 대상을 그려 나간다. (그는 이것을 ‘그림과의 대화’라고 말한다.) 이것이 빛을 머금은 대상이 형으로 드러나게 하는 행위다. 작가에게 ‘형’을 그리는 행위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불안’과 미지의 형이 나타날 것이라는 ‘설렘’이 뒤섞인 몸짓이다. 


 ‘형’은 ‘상’을 암시한다. 마음에 각인된 기억, 바로 마음이 그리는 이미지는 대상의 형과는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상이다. 작가는 “무엇을 보았는가와 무엇을 그리는가에 대한 고민을 한다.”(작업노트) 그렇다면 그가 그리는 것은 무엇인가? 그의 작품에는 대상에서 퍼져나가는 파동과 그 주위를 휘감고 도는 흐름이 자주 등장한다. 이것은 어느 때는 물결처럼, 어느 때는 기운처럼 보인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살아있는 생물뿐만 아니라, 죽은 생물이나 무생물, 인공물이 서로 주고받는 기운에 따라 자연이라는 공간 안에 놓여 있는 이유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자연은 눈앞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이전과 이후가 있다. 나는 그 중간에 어떤 순간을 관찰하는 것일 뿐이다.”(작가와 인터뷰)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느끼고 그것을 그린다. 그가 그리는 파동과 흐름은 형에서 드러나지 않는 대상의 기운이며, 이전에서 이후로 지속되는 자연의 시간성이며, 작가의 마음에 각인된 기억이다. 이러한 심경은 작품 아래 놓인 거울을 통해 그 상을 증폭시킴과 동시에 이것이 허상임을 형식적으로 드러낸다(<천 가지 나무>, <걷는 풍경> 등). 그는 비시각적 감각으로 보이지 않는 대상의 이면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무에서 다시 무로의 회귀, 불안과 설렘의 공존, 그리고 보이지 않는 기운과 영겁의 시간이 내재된 이면. 이 모든 것은 결국 윤회를 향해 간다. 조기섭은 생성과 소멸, 표면과 내면, 찰라와 영원이 결국 다르지 않음을 작업을 통해 보여준다. ‘풍경의 비밀’은 여기에 있다. 이미 지나갔거나 지금 왔거나 앞으로 올 삼라만상의 모든 것은 무에서 다시 무로 가는 윤회의 연속이다. 그는 은분을 칠하고 지워내는 과정에서 이를 보여준다. 무에서 다시 무로 가는 여정에 잠시 비춘 빛은 ‘형’을 드러내고 ‘상’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그의 작품을 마주 선 곳에 따라 ‘형상’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때 풍경의 비밀은 ‘비밀의 풍경’이 된다. 그의 백색도(白色圖)는 결국 무형상(無形象)으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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