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점을 지나, 경계에 서서


개인전 / 2024. 10. 09 – 10. 31 / 스튜디오126

평 론/ 김지혜



0도의 장소에서 발견하는 생멸의 자취


조기섭은 노동집약적인 작업을 일상의 큰 부분으로 치환한 성실한 작가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목도해온 삶과 죽음이 유기적으로 연계되고 교차되는 자연 이미지(바다, 하늘 등)에 대한 사유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으며, 2011년도부터는 공업용 도료를 활용한 은분(銀粉) 실험을 지속해오고 있다. 그는 날마다 종이에 은분을 곱게 펴 바르고 다시 그것을 갈아내는 수행적 작업을 14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반복해왔다. 청년 작가로 시대적 유행이나 시장의 요청에 민첩하게 반응할 법도 하지만, 조기섭은 자신이 채택한 장면과 질료를 끊임없이 파고든다. 우리의 시대에 이러한 집요함과 근면함이 다시금 소중해지는 이유는, 생각할 겨를 없이 빠른 속도로 새로운 것들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데 급급한 동시대적 예술 상황 속에서, 이러한 흐름을 거스르며 사유의 틈을 열어주는 역할은 성실한 예술가만이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개인전에서 조기섭은 마흔여섯 개의 패널로 구성된 다섯 점의 신작을 선보인다. 우선 그중에서 <구름의 그림자>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 작품은 일곱 개의 패널로 이루어진 가로가 전체 840cm에 이르는 대형 작품으로, 조선시대 왕의 신주를 모시는 종묘(宗廟)의 풍경을 담고 있다. 조기섭이 졸업한 학교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점도 채택의 작은 이유가 되었을 테지만, 그는 살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기리기 위한 건축물인 종묘의 장소성에 크게 매료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을 포함해 모든 국가와 민족의 역사는 흥망성쇠를 반복하면서 과거와 미래, 탄생과 죽음을 영속적으로 연결해왔고, 우리도 그 역사 속에서 이를 반복하고 있다. 그렇다면 조기섭에게 이렇듯 흥망성쇠의 과거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가 종묘인 것은 아닐까? 작가의 작품에서 인공적 건축물인 종묘는 흐릿한 은선(銀線)으로 담백하게 처리되었으며, 구름과 하늘 등 자연의 요소는 외광(外光)에 따라 시시각각 변모하는 영롱한 색채로 표현되었다. 여기에는 인공의 건축물은 지구의 자기장이 응축되어 방사능을 포함한 온갖 것들이 응집되어있는 ‘극점’처럼 죽음의 기운이 맴돌지만, 구름을 포함한 하늘은 그 기운을 생과 사의 경계로 다시 이끌어 새로운 순환(윤회)을 반복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이는회화아래함께설치되는거울을통해더욱 효과적으로 연출된다. 과연 우리의 육안에 포착되는 장면에서 회화와 반사 이미지 중 무엇이 실체이고 무엇이 비-실체 즉 환상의 이미지란 말인가?


다음으로 필자는 한라산 구상나무를 부분 이미지로 구획하여 ‘표현’한 <죽어도 죽지 못하는>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이 작품 역시 서른여섯 개의 소품으로 구성된 대형 작품으로, 각각의 프레임은 이미 죽어 황폐한 육신만 남은 구상나무와 그 폐허에서 새롭게 소생하여 돋아나는 가지와 잎을 담고 있다. 여기서 내가 이를 재현이 아니라 표현이라 쓴 이유는 조기섭이 겉으로 드러나는 장면만이 아니라 그것에서 발견한 삶과 죽음의 순환이라는 섭리를 말 그대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떤 그림은 구상나무 가지의 디테일한 결을 섬세하게 담고 있고, 다른 그림은 그 이미지가 추상적으로 환원되어 다양한 이질적 장면들 – 이를테면 한국화의 사군자나 구상나무와 관련성이 없는 새로운 도상들 –을 연상하게 한다. 또한 이러한 윤회의 흔적은 프레임을 나뭇등걸로 제작하여 나무의 나이테를 섬세하게 재현한 <명확한 지평선>에서도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사실적으로 묘사된 선들(나이테, 경계)은 그 사이에 있는 여백에 시선을 머물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그리고 관객의 눈에 여백이 익숙해질때쯤, 이 작품은 구상의 단계에서 반-구상과 추상의 단계로 나아가는 여정을 시작한다. 이외에도 블랙 미러와 함께 설치되는 <음운>과 물결을 고요한 파동을 표현한 <터무니> 등은 조기섭의 기존 작품들과 관계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 작품들은 재료 사용을 숙련도나 표현방식의 섬세함, 대상에 대한 고민 등이 깊이를 더하면서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나는 조기섭의 작품들과 관련하여 색채와 여백이라는 요소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중세 시대 이콘이나 고려 시대 불화 등 여러 종교화에서 금빛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신적 존재의 존엄을 더하는 숭고의 장치로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색을 최소한으로 절제한 모노크롬이나 무채색의 사각형 그림들은 감정의 따스한 온도를 배제하고 스스로 차가운 0도(zero degree)의 장소로 이동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조기섭의 은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작가는 은분을 바르고 다시 갈아내는 노동집약적인 과정을 반복해왔으며, 노동으로 두께가 다른 은빛의 면과 선은 확실히 덜 감성적이고 더 이성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차갑게 가라앉은 그 바탕에 은분을 다른 분채와 섞어 표현한 하늘, 지붕, 가지, 물결 등은 작품이 설치되는 장소와 빛에 따라 매우 다른 성질의 작품으로 변화한다. 따라서 조기섭의 작품은 여러 차례 보아도 시시각각 변화하는 장소와 빛의 컨디션에 따라 항상 다르게 보이는 마술적 장치가 된다. 


필자는 이에 더해 그의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여백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다. 동양화에서 여백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하지만 조기섭의 작업에서 여백은 그것들과 결이 다소 다르다. 이는 기본적으로 그의 작품이 동양화에 속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의 외양은 동양화에서 반복되어온 다양한 도상들과 연결되어있다. 하지만 그의매체사용이나작업과정은과거의동양화에서볼수없던 실험적 방식이다. ‘동시대에 동양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여러 시각예술 연구자와 비평가에 의해 꾸준히 진행되어왔기에 여기서 그 정의를 새롭게 규정하는 과정은 생략하고자 한다. 하지만 우리는 조기섭의 작업이 동시대인의 눈으로 포착한 동시대적 대상인 21세기 종묘와 구상나무, 하늘과 바다를 다루고 있으며, 처음부터 온전히 비워놓은 것이 아니라 은분을 덧바르고 지우는 방식으로 여백을 생성하였다는 점에서 “일체 만물이 끊임없이 생멸변화하여 한 순간도 동일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과정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비어있는 것과 채워진 것을 비워낸 것은그 의미가 다르다. 전자는 채움의 기억을 지니지 않지만, 후자는 채움의 만족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자발적 선택과 행위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그의 여백들에서 다시 살아갈 것들의 징후와 이미 죽은것들의 현존과 만나게 된다.그의 여백은 생사고락의 과정을 겪으며 생성된 초월적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초월성의 바탕에는 조기섭의 집요함과 근면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비 평 / 우 아 름



극점을 지나, 경계에 서서 

: 생성 소멸하는 관상 풍경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시간이란 생성되고 소멸하는 만물의 급류라고 썼다. 매 순간 삶과 죽음이 절체절명으로 갈리는 전쟁터에서 썼다고 알려진 명상록에 남긴 문장이다. 폭우로 순식간에 불어난 물줄기는 급류가 되어 제 자신도 휩쓸리면서 존재들을 쓸어간다. 휩쓸린 만물의 생사가 얽힌 아수라장, 휘몰아치는 급류 속에서 존재들은 어떤 풍경을 이루는가. 


형과 색이 분명한 그림은 대개 한눈에 뵌다. 그러나 조기섭의 그림은 오래봐야한다.그의그림의 형과 색이 관객의 위치와 빛의 각도에 따라 일순간 발현되었다가 휘발되길 반복하면서 시간 층위에서의 감상을 요하기 때문이다. 그림으로부터의 거리와 시선의각도를바꿔가며여러번그림을보다보면각각의 이미지의 총합이 어느덧 마음속에 그림의 전체적인 형상으로 떠오른다. 시간을 두고 마음으로 보는 그림이다. 이는 얼마간은 그림의 재료인 은분의 기능이다.


작가란 무엇보다 자신의 재료를 선택하고, 그 재료에 지배당하지 않는 자이다. 채색화를 그리던 조기섭이 은분과 호분을 재료로 선택한 순간부터 작가는 기법과 주제의 두 측면에서 모험을 감내해야 했다. 그것은 생소한 재료를 뜻대로 다루는 방법을 연마하고, 재료가 어떤 조건에서 어떤 빛을 내는지 익히는 과정이며, 한편으로는 형과 색에 깃든 시간성이 열어주는 주제의 길을 돌파하는 과정이다. 그림의 형상 위에 은분을 도포한 후 표면을 갈아내고, 다시 형상을 부여하는 붓질과 덜어내는 샌딩의 과정을 통상 5회 이상 거듭한다. 그의 작업 방식은 이러한 성취가 갑자기 떠오른 재치나 얼결에 주어진 운이 아닌 매일의 수고로 걸어온 길임을 알려준다. 그렇게 작가는 매번의 전시에 도달한다.


조기섭은 풍경으로 들어가 호흡하고 걸으며 온몸으로 감각하고, 작업실에 돌아와 기억에 남은 잔상을 길어내 그린다. 그의 작품 창작과 감상에는 불교의 수행법인 관상법을 떠올리게 하는 면모가 있다. 관상법은 현장에 나가 눈으로 보고 마음에 담은 형상을 수행소로 돌아와 눈을 감고 마음의 눈으로 떠올리는 수행법이다. 관상의 대상은 자연물이나 불상과 같은 외부의 형상으로부터 미래에 시체가 될자기 몸에 이르기까지나와 세계의경계와 생사를 초월한다. 사물의 형상을 관상하는 목적은 집중과 몰입을 통해 최고의 정신에 이르는 것이겠으나, 제 사후의 육신을 관상하는 목적은 생의 집착을 떨구는데있을테다. 마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현장과 형상은 어디에 있는가? 심안에 떠오른 형상은 어느 시간의 것인가. 마치 살갗에 뿌린 향수가 공기 중에 남긴 잔향(sillage)처럼, 그것은 어느 시공간이나 제 생사에도 매이지 않고 세상의 형질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순수한 이미지다. 


이번 전시에는 종묘, 물결파, 나이테, 구상나무 고사목을 그린 그림이 전시된다. 그림의 대상이 된 것들은 모두 죽음의 그림자를 품고있다.그러나 이들의 죽음은 완전한 소멸이 아닌 생과 맞닿아 있다. 이를테면, 왕가의 위패를 모신 종묘는 지극한 예를 다해야 할 곳으로 산 자들의 세계에 실존하고, 백골을 닮은 구상나무 고사목은 죽어서도 생의 시간만큼 제 자리를 지킨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 섞인 시공간의 배경에 원경의 산과 근경의 바위가 구름과 빗속에 어우러진 풍경을 그린 <음운>은 급류에 휩쓸린 존재들의 풍경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 장면들을 <나이테>와 <터무늬>라는 두 점의 소품이 이어준다. 나무들은 여름의 생장과 겨울의 일시적 죽음의 기록인 나이테를 제 몸에 새긴다. 수면에 생성되는 동심원의 파동은 생성되는 순간 그 자리에서 소멸하면서 더 넓은 지경으로 확장한다. <나이테>와 <터무늬>는 만물이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며 더 큰차원을 포괄하는 순환고리로 얽혀 있음을 전한다.


종묘를 그린 <구름의 그림자>와 구상나무 고사목을 그린 <죽어도 죽지 못하는>은 형상 배치의 정석과 파격을 보여준다. <구름의 그림자>는 대형 화폭의 너른 공간에 종묘의 정면을 가득 채워 그림으로써 죽음을 기념하는 건축이 산 자들의 세상에 떨치는 권력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런가 하면 구상나무를 그린 <죽어도 죽지 못하는>은 작가가 시점을 다루는 운신의 폭을 보여준다. 산행길에 스쳐 지나가게 되는 구상나무 군락은 세 개의 시점에서 세 번 새롭게 파악된다. 산행길에 스쳐 지나가며 보는 근경의 형상,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군락의 형상, 산행 후에 떠오르는 중첩된 형상이 그것이다. 36개의 분절된 화면 속에 자리한 구상나무 가지 각각의 그림은 근경에서 포착한 형상이겠으나, 이것이 서로 필연적인 연결성을 떠나 그려지고 설치된 방식은 임의 접속 가능한 중첩의 세계로 나아간다. 심상으로 바라볼 때 시점은 지나온 모든 시간 속에서 동시 재생되기 때문이다.

 

조기섭은 그림이 일으키는 환영 속으로 자연스럽게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공간 설치도 함께 구상하곤 한다. 그림의 바닥 면에 거울을 설치하여 그림의 빛과 색을 전시 공간으로 확장하는 것도 그러한 기법의 하나다. 이는 작가가 몰입했던 시공의 경험을 관객에게도 끼치기 위함일 것이다. 현장에서 수행소로 돌아온 이의 관상 풍경을 떠올려 본다. 생에의 집착을 벗어난 정신에는 무엇이 자리 잡는가? 공허를 향해 나아가는 무의미한 생인가, 만물의 생성과 소멸의 모든 가능성으로 채워진 지금이라는 순간인가. 《극점을 지나, 경계에 서서》에서 작가가 건네는 질문이다.

비 평 / 구 윤 지 


독립큐레이터 조기섭 개인전 《극점을 지나, 경계에 서서》 

스튜디오126 <공동의 집> 비평프로그램 - 작가와의 만남 

 

일시: 2024년 10월 12일(토) 오후 7시 30분 

장소: 스튜디오 126(제주시 북성로27, 2층) 

진행: 구윤지 독립큐레이터



구윤지 독립큐레이터

안녕하세요. 저는 조기섭 작가님 개인전의 작가와의 만남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된 구윤지라고 합니다. 이 자리를 위해서 저희가 한달 전부터, 작가님의 작업실에서 두번 정도 사전 미팅을 가졌었어요. 작가님 작업은 이전부터 다른 전시에서 여러 번 관람자로서 만난 적은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조금 더 면밀히 볼 수 있었고, 보다 가까이 가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나눴던 대화들을 조금 같이 공유해보고, 이 자리에서 조금 더 갈무리해가는 과정을 진행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저는 작가님 작업에 전시회 제목에 대해서 먼저 말을 해보고 싶어요. 계속 자연을 강조하시면서 이렇게 삶이나 윤회 그리고 순환 같은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오셨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를 하시고자 하는지는 대략 유추해 볼 수는 있지만, 죽음과 연관된 것에 대해서 조금 더 집중적으로 뭔가 얘기를 하시고자 제목의 '경계'나 '극점'과 같은 어휘들이 사용되었다고 생각이 들어요. 이 부분에 대해서 설명하시면서 전시에 대해서 조금 소개 부탁드려요. 


조기섭 작가

안녕하세요 조기섭입니다. 이번 전시 제목은 “극점을 지나, 경계에 서서”라고 지었는데요. 이 전시에서 제일 중요한 단어는 ‘경계’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10년 정도 윤회에 관련된 주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져왔어요. 왜 그렇게죽고사는문제에관심이많은지모르겠지만,2년전이 전시 기획에 대해 생각하면서 윤회의 경계에는 항상 죽음이라는 단어가 있고, 죽음이란 과연 무엇일까에 대한 질문을 다시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른이 되면서 죽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 부모님과 친구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제가 해석하는 죽음과 다른 사람들이 해석하는 죽음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타인의죽음이후몇년의시간이지나면서각자어떻게 살아가는지, 그 해석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지켜보면서 ‘서로 다른 결과들을 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어떤 이는 슬픔에 매몰되어 끝나버리기도 하고, 어떤 이는 죽음을 통해서 자기의 삶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시작점을 만드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단편적으로 두 가지만 얘기했지만, 더 많은 경우의 수가 있겠죠. 그래서 이 경계에서 선택의 지점에 대한 이야기를 전시로 풀어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경계에 서서’라는 전시 제목이 뒤로 붙었고요.


‘극점’에 관해서는, 이 전시를 준비하면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얻은 아이디어입니다. 그 친구는 미술 분야가 아니라 외항사의 스튜어디스를 하는 친구였는데, 그 친구가 말하길 일에서 자기의 경계는 일반적인 노선이 아니라 극점을 지나는 노선을 탈 때라고 하는거예요. 극점을 지나는 노선을 타게 되면 방사선 피폭 위험이 있어 국제법으로 1년에 몇 번 이상 그 노선을 탈 수 없게 정해 놓은 노선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 노선이 몸에 무리를 줄 것을 알면서도 직업을 선택했기 때문에 계속 타야 하는것, 그것또한 본인의 선택인 거잖아요.


삶에서 선택이 제시하는 무리한 상황들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그리고 그 것들이 죽음을 바라본 후의 삶의 선택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생각하게 되었고, ‘극점을 지나, 경계에 서서’가 이번 전시 제목이 되었어요. 전시 준비하면서 처음 썼던 문장이 ‘처음에 선 자가 뒤돌아 끝을 본다.’였습니다. 이 한 문장을 써놓고 작업을 했어요. 경계에 선 자가 앞과 뒤, 좌우를  돌아보았을 때, 자신의 선택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답은 무엇일까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이번 전시를 준비했습니다. 


경계로서의 죽음과 죽음 이후의 삶, 그리고 죽음까지의 삶, 이런 것들의 연장선에서 쭉 작품 하나하나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고 설명을 먼저 들었는데, 전시장 중심에 있는 이미지 작업을 보면서 조금 얘기를 해봤으면 좋겠어요. 이 작업의 제목이 <구름의 그림자>잖아요. 근데 이 작업에 대해서 제가 종묘를 그리신 거에 대해서 되게 궁금해서 작업을 하실때 어떤 진행과 정에 대해서 여쭤봤어요.


맨 처음에 이전에는 작업을 이렇게 작업하실 때 과정이 타의 관점에서 자연을 먼저 접하시고 그것을 관조하거나 사유의 과정을 거치신 다음에 관념적인 키워드들을 찾아가고 더해가는 과정이었다면, 요즘에는 사유의 과정을 거친 좀 약간 정리되고 정렬된 그 세계관 안에서 지나간 경험에서의 이미지들을 떠올리면서 작업을 하신다고 설명을 해 주셨어요.


그래서 이 죽음의 기표로서 종묘를 선택하게 된 과정이 궁금해요. 덧붙여서 그때도 말씀드렸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제주도에서 삶과 죽음에 대해서 느끼고 참 기이하다고 느꼈던 게 돌무덤들이었거든요. 제주도에서는 그냥 길을 가고 있다가 밭 한가운데 있는 돌무덤들이 있잖아요, 일상 안에서의 죽음에 대해서 떠올리는 아주 직접적인 어떤 이미지였어요. 작가님께서도 제주에서 그런 기표들을 흔하게 자주 접해오셨을 텐데, 종묘를 선택하신 이유가 궁금했었거든요.


우선은 처음으로 종묘를 선택한 게 죽음을 모신 건물이라는 대표성이 제일 컸던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인공물을 많이 그리지 않거든요. 인공물 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저에게 크게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모든 순환의 본질은 자연 안에 있다고 생각해서, 저에게 인공물은 본질적인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많았어요.


자연을 그릴 때 작업 방식이 어떤 공간 하나를 계속 탐닉하고, 오랫동안 가서 보고, 계절별로, 시간대별로 가서 보고 해서 마음에 들어와서 ‘눈을 감아도 보이는 풍경’이 됐을 때, 작업실로 돌아와서 스케치 없이 화면에 빽칠을 하고 샌딩을 합니다. 마음에 담아둔 공간이 펼쳐지길 상상하면서요. 제 그림이 다 샌딩하는 작업이거든요. 갈아내는 작업을 약 6번 정도 하는 그림이에요. 이 샌딩이라고 하는 과정이 살살 밀어내는 것 같지만 내 욕심이 드러나지 않게 종이의 바탕이 드러날 정도로, 기계로 다 밀어버리거든요.


이렇게 기계로 밀어내며, 종이가 본래 가지고 있던 공간과 제 안에 들어오는 풍경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형태의 작업을 하다가, 자연을 찾아 본질을 보려고 했던 것처럼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찾아가는 인공물에도 내가 자연에서 느꼈던 ‘경’의 의미를찾아볼수있을까?라고생각해서처음그렸던게불상 작업이었어요. 직접 보았던 인공물 중에 사람이 만들었다고 믿기지 않았던 반가사유상, 석굴암 본존불, 서산마애삼존불에서 얼굴을 중심으로 정신성의 실존으로서 가능성이 있는가에 대한 답을 찾으며 그렸었어요. 참고로 저는 종교가 없어요.

 

건축인 종묘를 선택한 이유는 권력의 실존을 담은 공간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기 위해서였어요. 종묘는 왕이 자신의 역사를 죽음에 맞닿아 전달하기 위해 건축한 공간이잖아요. 그래서 존재하는 공간인데 구조학적으로 굉장히 멋진수평적형태를가지고있고,전세계적으로보기드문 형태입니다. 저는 이 건축의 시작점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했어요. 우리는 종묘에 가서 무엇을 보나요? 왕의 위패를 모신 공간을 통해 왕은 무엇을 전달하려 했을까요? 저는 눈앞에 실존하는 종묘, 그경계에서사라지지않길바라는절대권력이가지고있는힘을 느낍니다. 건물이 존재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 사유하게 된 것이 아니라, 왕이 이미 고려했기 때문에 그 생각이 집대성되어 나온 결과물이었던 거예요.


순환으로 보면, 이러한 선과 후의 실존하게 된 이유로 후대 사람들이 그 부분을 사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눈앞에 존재한 것 이전의 본질을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인공물, 그래서 죽음의 공간으로써 종묘를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작품의 제목을 <구름의 그림자>라고 지었는데요. 아까 관람자분이 오셔서 너무 제목이랑 작품이랑 동떨어져 있는 제목을 지은 거 아니냐라고 질문해 주셨어요. 저는 제목에서 제가 종묘를 바라본 시점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구름이 종묘고, 그림자가 우리가 공간에서 느꼈던 정신이에요. 하지만 빛이 없다면 구름이 있다고해도그림자가생기지않죠.빛이왕의생각한종묘의존재 이유, 정신 즉 본질의 시작점이고, 죽음의 기표로써 이 빛을 그리기 위해서 종묘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저는처음봤을때‘애도하는마음,어떤무언가를기리는마음에 대한 역사와 시간이 담겨진 우리 문화의 상징물로서의 종묘’ 이런 의미도 중요하게 작용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제가 성균관대학교를 나왔어요. 주변이 다 이런 느낌의 공간과 건물들이 많아요. 학교 안에도 명륜당이 있고, 목적과 기능은 다르지만 비슷한 구조의 느낌인데 좀 작죠. 대학생 때, 감사원 앞길을 통해서 인사동으로 수요일 날 저녁마다 전시를 보러 다니면서 보는 인왕산, 다른 지역에 가더라도 한국적인 정취가 있는 곳을 가면 좋아요.공간이 새긴 시간을 느끼며 그간의 시간을 돌아볼 수 있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이런 이미지들이 저에게는 친숙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러한 이미지를 차용하는 것에 거부감이 없는 것 같아요. 


서양의 건축물들 중에는 기리기 위해서 역사적으로 만든 건물들이 위로 엄청 뾰족하잖아요. 그래서 사실 뭐 이렇게 방문을 하면 이렇게 홀리하다 약간 이런 느낌을 받잖아요. 그와 비교해 보면 되게 낮은 건축물이잖아요. 종묘는. 이게 신성함과 권력에 대한 얘기인데 서양의 건축물들은 홀리함을 강조하기 위해 높게 첨탑들을 짓기 위해 사람들을 많이 희생시키고 그것을 행해지게 했던권력또한시각화했다고할수있는데,동양의건물들은낮게 지으면서 온건한 권력을 유비하게 하면서 그 애도하는 마음 또한 보는사람들에게조금더가까이와서접해질수있게끔하는그 건축의 미학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어떤 고민을 하면요. 똑똑한 누군가가 벌써 정리를 해놓은 것을 발견하곤 해요. 작업 개념을 고민하다가 불현듯 정리되지 않던 단어들이 문장으로 연결되어 떠오르면 작업 노트에 적어 놓거든요. 그 순간에는 내가 처음으로 떠올린 생각이라고 여겼는데, 나중에 찾아보면 이미 있더라고요. 제가 선택하게 되는 근원적인 문화와 관련된 것들을 찾아보다가 본 글인데, 춤을 출 때 서양에서는 발끝을 하늘을 향해 쳐다보게 춘다고 해요. 서양은 하늘을 동경하는 문화이기 때문에, 하늘로향해서춤을추고,동양은발을땅에딛고땅을향해서 춤을 춘대요. 이런 현상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느낄 때 이유를 찾으려고 해요. 어떤 선택을 할 때 동서양으로 나누어서 나는 이쪽을 추구해야지 이런 건 없어요.


위엄이라는것과그이면의정신을보는것들에대한제 생각은 동양의 정체성 안에서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있어요. 사람 사는 모습은 다 비슷하잖아요? 비슷한 상황을 다른 세계관으로 풀어내는 차이와 비슷한 공통점을 동서양의 문화에서 발견할 때 희열을 많이 느껴요. 서양의 조각과 건축은 직접 본 경험이 적지만, 개념을 찾아 그리고 싶은 대상을 선정한 이미지가 서양의 것이라고하면,직접본적없는대상이기에더상상력이배가 되는 것 같기도 해요. 예전에 카리아티트의 기둥을 비율을 9미터 정도로 늘려 조각상 기둥을 그렸었어요. 


작업에 대해서 얘기를 이어가보도록 해요. 이 전시장에 왔을 때 <구름의 그림자>가 위치한 전시장 중앙에 오기 전에 통로에서 구상나무 작업을 먼저 접하고 여기로 오게 되잖아요. 작업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셨을 때는 작품이 각각 따로 있는 공간에서 설명을해주셨는데공간에왔을때전시를보게되는과정이 작업을 하시는 내용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 지점이 있었어요. <죽어도 죽지 못하는 (구상나무)>를 보면서 죽음 자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이면을 떠올리게 되는 연상의 과정에 대해 들었고, 여기에 도달하기까지 또 죽음에 대해서 사유하는 과정을 거쳤다라는 어떤 사유의 과정이 쭉 이어지는 전시 설치라고 저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런 측면에서 <죽어도 죽지 못하는(구상나무)> 작업과정과 설치를 하기까지에 이야기를 듣고싶어요.


저는 스튜디오126과 같이 이제 일을 한 지 오래됐어요. 그전에는 화면 하나만 보고 작업을 했고, 전시 디스플레이까지 고민하면서 작업하진 않았거든요. 근데 제가 스튜디오126 공간에 계속 주기적으로 가게 되면서 그 공간의 특징들을 자연스럽게 관찰하게 되었고,그결과,공간을염두에두고작업을시작하게된계기가 됐어요. 올해 스튜디오126이 이곳으로 이사 왔는데, 들어왔을 때 복도가 있고, 뒤에 넓은 공간이 메인 공간이 있더라구요.


처음에 전시를 계획할 때부터 이 종묘 작업을 메인으로 정했어요. 작년 5월부터 올해 5월까지 1년 동안, 이 작업에만 몰두했어요. 완성하고 나서 복도와 공간 구조를 어떻게 했을 때 전체가 어우러질지 고민하던 중, 경계 위에 사는 식생을 찾아서 그림으로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구상나무를 선택해서 그리기로 했습니다. 1,400m 이상의 높이에만 서식하는 구상나무는 온난화로 죽음이 밀려 올라가는 삶을 살고 있고, 한정된 땅에서 정상까지 밖에 살지 못하는 구상나무를 통해 자기 죽음의 끝을 바라보고 사는 생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제 아빠가 그랬거든요. 그래서 한라산 정상까지 처음으로 올라가 봤어요.


산행을 시작하고 등산로를 따라 군락지의 시작점에 들어갔을 때 너무 흥분되는 거예요. 이미지만 많이 봤던 대상을 실제로 보니 너무나 멋있는 형태를 만들어내고 있었어요. 그 안에 들어갔을 때 보이는 디테일한 모습들이 인상적이어서 계속 사진을 찍으며 정상까지 올라갔어요. 그런데 정상에 올라가서 뒤를 돌아 내려다보니, 이 나무들이 백골이 되어 누워 있는 거예요. 내가 죽어있는 무덤을 지나왔다는 것을 그때 알았어요. 군락지를 지나가는 동안 살아있다는 믿음에 취해서 죽음을 보지 못한 거예요. 저는 죽어있다고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요. 정상에서 동물이 뼈만 남겨져서 죽어 있는 것처럼 드러누워 있는 나무들을 보니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하나의 풍경으로 그리려고 했던 작품 계획을 수정했어요. 이 작품은 36점으로 돼 있는데요, 각 화면에 32번의 죽음을 영정 사진으로 그린다고 생각하고 그렸어요. 판넬 연결을 생각해서 그린 그림이 아니기에 하나로 연결되는 작업이 아니에요. 통로에 디스플레이한 이유는 제게 허락된 공간이었던 등산로처럼 정해진 범위 안에서만 걸어갈 수 있는 공간을 설정하기 위함이었어요. 등산로에서처럼 저 멀리도 여기서 봐야 하고, 이 앞도 여기서 봐야하며,한정된 공간 안에서 바라봐야하는 통로와 같은 물러설 수 없는 공간이 필요했어요.


한정된 공간에서 기존에 가지고 있는 믿음에 따라 해석된 감상은 제게 고사목이 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었죠. 다른 위치에서 이 사건을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면 그 속에 제가 있을때 확증편향 적인 시각으로 보지 않았을 거예요. 


전시장에서 인식의 오류를 만들어 내기 위해 작업은 통로 벽면에 연결되는 것처럼 디스플레이를 했어요. 하나하나가 따로 되어 있는 작업인데 연결된 것처럼 디스플레이를 한 이유는, 관람자들이 익숙한 방식대로 그림을 보게끔 유도한 거예요. 저렇게 연결된 부분이 있는 것처럼 구성해 놓으면 사람들은 연결된 그림이라고 생각해서 계속 뭔가를 찾거든요. 이런 내용을 모를때는그림과 그림 사이 이미지가 연결되지 않는부분을 연결하려고 상상하면서 ‘작가가 그래서 이걸 이렇게 배치했네, 근데 뭐 하나 빠져 있고, 빈공간도 있고, 이 빈공간은 뭐지? 뭔가 이유가 있겠구나’ 하며 보실 텐데, 하나의 그림이라고 생각해서 계속 해석하는 모습이 관찰돼요. 연결된 그림이 아니라고 말씀드리는 순간이 제가 정상에서 구상나무를 내려다봤을 때의 상황이 되길 바랐어요.


<죽어도 죽지 못하는>이라고 제목을 지은 이유는 고사목이 되어 이미 죽었는데, 제 사고안에서는 죽지 못하게 하는 선택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전체 작품의 제목을 지었고요. 32개의 그려진 영정 사진의 제목은 숫자로 되어 있는데, 그건 제가 선택했던 사진의 파일명이에요. 제가 한 100장 좀 넘는 사진을 찍었더라고요. 그 사진들을 보면서 선택하는데 순차적으로 표기되어 있는 파일명에 있는 숫자들이 각자 다른 시간의 죽음을 기록한 것처럼 보이더라구요. 한장의 사진에 기록된 많은 죽음 중 한생의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 제 눈을 사로잡는 부분을 크롭하여 작업했어요.


나머지 4개는 빈 여백이고, 가운데는 판넬없이 아예 비어 있어요.비어있는 4개의 판넬은 다음 세대의 터전이 될 땅으로 설정해서 비워 두었고,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은 빈공간 하나는 제가 느꼈던 미안함을 상징해요. 실제로는 37개의 시간이 걸려 있는 거죠.


설명해주신 것처럼 이게 전체 구성까지 그리시면서 하시고자 하는 이야기를 펼쳐냈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관람자 입장으로 이 구성이 작가가 작업을 하기위한 사유와 인식의 과정까지도 유추해 볼 수 있는 자극이 된다고 봅니다.


현대미술에서 자주 언급되는 들뢰즈가 사유와 이미지라는 주제에 대해 얘기를 하면서 어떤 새로운 경험의 순간에 어떤 것을 상기하는 게 사실은 아주 낯선 것들이 떠오른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본연, 그안에서 원래 가져왔던 질문을, 그 아주 기저에 있는 것들에서 비롯된다고 얘기한 바가 있어요. 


그래서 ‘어떤 것을 보고 지각한다’ 라는 것에 있어서 저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그래서 재현한, 제안한 무언가가 개개인마다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고,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관람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어긋나기도 하고 튕겨나가기도 하는 것이라고 생각 하거든요. 그런데 작가님 작업은 그 연상의 방향에 영향을 미치는 절대적인 감각 조건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 조건들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자면 먼저, 전시를 하거나 작품을 선보이실 때마다 이야기도 많이 하시고, 질문도 받으셨겠지만 은분이라는 재료가 있어요. 그리고 이번 전시 평론을 써주신 선생님께서도 ‘노동 집약적인 테크닉’이라고 표현을 해주셨는데, 거대한 스케일의 작품, 그리고 전시장에 설치될 때 함께 바닥에 설치되는 반사경으로 인해서 확장되는 화폭으로 인해서 발생되는 효과가 있어요. 저는 그게 숭고라고 생각하는데, 마치 권위적인 어떤 단어처럼 들리지만 순수하게는 마음의 움직임이라고 생각해요. 그 움직임이 발생함으로써 작가님이 말씀하시고자 했던 곳으로의 정향하게 되고, 가까이 다가가게되는것같아요.저는매체에대해서굉장히관심이항상 많았고, 서양 현대 미술을 공부하다 보면 매체론에 몰두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거든요. 굉장히 다양한 어떤 매체들이 있어왔지만 항상 작가들은 이야기를 담고, 전달하고 싶어한다는 것이 본질이잖아요. 


작가님의 작업이 이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장치들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저는 만약에 말씀 주신 내용이 전시를 통해서 느껴졌다면 반은 성공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뒤에 소리 들리시잖아요. 모든 전시를 따라다니는 소리거든요. 제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만들어낸 음악인데, 시청각적인 경험을 통해 숭고함이 느껴졌으면 좋겠어요. 제 그림은 다가갈 수 없지만, 멀어질 수도 없는 절대적인 거리감이 있다고 생각해요. 관람자가 그림 안에 존재하는 거죠. 사유의 거리감을 위한 화면, 설치, 공간이 연출을 통해 내가 느꼈던 시공간의 감촉, 그 순간을 전시장에 구현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 의도가 강화되면서 은분이 전면에 드러나는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효과를 더하기 위해서 그림이 점점 커지고 있어요. 저희 어머니가 되게 싫어하시는데요. 그만 좀 크게 그려라! 이러시는데, 아마 앞으로 더 커질 것 같아요. 은분이 빛을 만나 화면에서 일루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작은 화면에서는 효과를 많이 볼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조 저도 말로 정확히 어느 지점이라고 표현하기 힘들었는데, ‘문을 열게 되는 지점이 생긴다.’라고 표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맘에 들어요.


감사합니다. 이건 정말 제 개인적인 어떤 감상의 과정에 대해서 그러니까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라고 조금 면밀하게 살펴보고, 자세하게 들여다보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오늘 작가와의 대화에서는 이 과정을 공유하면 보시는 분들이 작가님 작업을 이런 방식으로 관람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이게 작가님이 작가 노트에 있던 “결과로서의 연상”으로 재현적인 대상이 유비하는 관념적인 세계를 감상하는 저만의 과정이었는데, 이 과정에 대해서 부연 설명을 혹시 해주시거나 덧붙이시고자 하는 것이 있으실까요. 


관념이라고하는게 제가 작업을 하면서 여기 관념을 집어넣는다고 생각해요. 무슨 말이냐면 사유하는 것을 사유한 것에서 끝내고 행위에 담지 않으면 거기서 멈춰버리는데, 그림을 그리면 사유의 시간이 계속 쌓이는 거죠. 이 큰화면의 그림을 세필로만 그림을 그리는데, 그림 그리는 수많은 시간과 화면과 대화를 위해 계속 관찰하면서 멀리 떨어졌다 앞으로 갔다 하는 발걸음들이 있잖아요. 그 축적이 결국 관람자에게 행위의 관념으로 전달된다고 생각해요.


가끔 모른척하고 전시장 가서 관람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그럴 때 제일 좋은 순간은 빨리 보고 지나가는 사람이 갑자기 다시 그림 앞에 다시오는 순간이에요. 그러면 제일 좋은거예요. 그런 사람들은 ‘뭔가 있었는데’라는 느낌에 이끌려 다시 발걸음을 돌린 거예요. 잔상이 생긴 거죠. 그러면 진짜 오래 보시거든요. 이 순간이 제가 그림 앞에서 쏟은 관념들, 투사했던 것들이 전달되는 순간이라고 생각하고, 관람자가 그림에 질문을 시작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해요. 그 질문 중에는 작가가 제시하는 질문이 있겠죠. 왜 이 소재로 죽음을 이야기하려 했을까? 


종묘, 구상나무, 나이테, 파동, 비, 돌, 구름의 소재들은 우리 주변에 있었던 것들이잖아요. 이 소재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어느 곳일까에 대한 질문을 했고, 그 답들은 우리가 선택하는 생의 다양성에 있어요. 작가인 저의 답을 듣고, 다른 생을 살았던 본인의 답을 바라봤으면 좋겠어요. 


마음의 선문답을 마주하기 위해 저는 그림이 포근했으면 좋겠어요. 그림이 나를 딱 감싸안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한지 중에 장지라고 하는 재료에 주목해요. 바탕이 되는 장지가 품어 주는 느낌이 좋아요. 그 안에서 은분이 스스로를 빛내며 반짝이거든요. 동서양의 다른 재료를 가지고 실험을 많이 해보았는데 다 밀어내기만 해요. 따뜻함이 없으면 오래 보기 힘들거든요. 


그래서 일단 일상에서 경험하고나서 그거에 대해서 떠올리면서 생각을 많이 해야 되는 작업이잖아요. 그리고 그 이면에 것들에 대해서전달을하는과정을작업을하시는건데,저는정말 어렵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작가님이 되게 어려우신 분이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제가 원하는 바는 아닌데요. 많이들 어렵게 생각하더라고요. 


작가와의 대화를 어떻게 해야 되지 막 이런 고민들이 되게 많았어요. 그런데 기우였던게, 작가님은 작가님 회화 그 자체처럼 커뮤니케이션이 엄청 적극적이시더라고요. 사소한 것도 하나하나 설명해주시기도 하시고. 그래서 의외로 문을 마주하고 나면 친절하게 이해되는 작업들이라고 생각도 했어요. 쉽지 않은 작업들을 계속 진행해 가실텐데, 앞으로 작업활동에 대해서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가까운 미래에 계획된 전시라던지요. 


저는 작업을 뭘 해야겠다고 생각보다 계획하지는 않아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최근에 알게 된 게 자연과 인공물을 그리면서 자연이 가지고 있는 본질이 무엇인지 질문을 쏟아 냈던 이유가 ‘내가 사람을 그리고 싶었구나’, ‘사람 생의 본질을 그리고 싶었구나’라는 걸 깨달았어요. 새로운 깨달음이 있었으니 깊게 들어갔다 나와야 할 것 같아요.


이 질문은 작가로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지내느냐로 답하고 싶어요. 죽은 물고기만 물결을 따라서 흘러간대요. 그러니까 저는 살아있는 고민을 하고 있고, 제 선택의 방향이 맞는지 틀린지 모르지만, 하나의 물결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그걸 담보하는 최선의 행위는 약속한 걸 지키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생각보다 약속을 잘 지키지 못해서 결과로 못 보여주는 게 많이 있거든요. 작업도 마찬가지고요. 


물론 약속은 타인과의 약속일 수도 있지만, 저는 저와의 약속을더어렵게생각해요.저는시간별로제가있어야할 공간에서 하고 있는 것들을 해야 하는 저만의 루틴이 있거든요. 100% 지킨 건 아니지만, 지키려고 굉장히 노력하고 제 호흡으로 작업을 계속할 예정이에요. 이 약속을 지키는 게 예전에 비해 점점 더 쉬워지고 있어요. 포기하는 것들이 많아졌거든요. 예전에는 욕심을 버리지 못했어요. ‘이것도 해보고 싶고, 저것도 해보고 싶고, 남들은 이렇게 한다는데’, 그런데 이제는 그게 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한테 좀 시간을 더 들이고, 저한테 한 약속을 꾸준히 전시와 작업으로 발표할 계획이에요. 왜냐하면 성공하고 싶거든요. 


성공의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빨리 성공하고 싶지 않아요. 천천히 하고 싶고, 사실 꼭 성공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이미 제가 원하는 걸 많이 이뤘다고 생각하고, 작업하는 호흡을 놓치지 않는 게 저의 성공이라고 생각해요. 많은 제안이 있지만, 좋은 제안이라도 전부 다 할 수 없음을 이해해야 하더라고요. 그리고 그 선택의 지점에는 항상 작업이 우선이어야 해요. 작업을 잘하기 위한 호흡을 유지하며, 약속을 잘 지키는 작가로 작업을 하겠다는 계획이 있습니다.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여기까지 조기섭 작가와의 만남 진행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조 저는 작업을 뭘 해야겠다고 생각보다 계획하지는 않아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최근에 알게 된 게 자연과 인공물을 그리면서 자연이 가지고 있는 본질이 무엇인지 질문을 쏟아 냈던 이유가 ‘내가 사람을 그리고 싶었구나’, ‘사람 생의 본질을 그리고 싶었구나’라는 걸 깨달았어요. 새로운 깨달음이 있었으니 깊게 들어갔다 나와야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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